시월은 틈이 없다. 영월에서 오전에 빨리 일을 끝내고 민둥산으로 향했다. 강원도 정선에는 가을빛으로 채색된 아름다운 ‘길’이 있다. 억새를 품은 길, 하늘과 맞닿은 길, 레일 위를 달리는 길이다. 그 중에서 억새를 품은 길인 민둥산을 21일에 올랐다.
‘가을 여인’ 억새의 은빛 유혹하는 민둥산(1119m)은 명성산(경기도 포천), 오서산(충남 홍성), 천관산(전남 장흥), 영남알프스(울산 울주) 등과 함께 전국 5대 억새군락지로 꼽힌다. 봄 여름 겨울에는 등산객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가 가을 억새철만 되면 여행자들이 줄을 선다. 산 정수리를 뒤덮은 20만평의 하얀 꽃물결이 유혹의 손길을 뻗치기 때문이다.
민둥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쉽게 오르려면 증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이 곳에서 1코스 ‘완만한 경사’ 길을 따라가면 울창한 나무 사이로 산허리를 휘감아 돈다. 초반은 약간 가파르지만 이내 유순한 길이 이어진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높이 자란 낙엽송이 짙은 그늘로 따가운 가을햇살을 막아 줘 걷기에도 편하다. 산책하듯 걷다보면 어느새 광섬유 같은 억새꽃이 눈앞에 다가선다.
억새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등산로는 가르마처럼 산마루 너머 건너편 산으로 흘러간다. 정상에 서면 산은 구릉과 구릉으로 이어져 있다. 남쪽 방향 억새군락지 너머 함백산, 가리왕산, 백운산, 태백산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억새는 단풍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을바람에 은박지처럼 반짝거린다. 늦은 오후에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강렬한 역광에 황금색으로 물들며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처럼 출렁인다.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깔때기 모양으로 움푹 팬 거대한 웅덩이가 신비롭다. 혹성탈출에 나올법한 분화구 모양이 인상적이다. 돌리네(doline)로 불리는 이 웅덩이는 석회암이 빗물에 녹아 지반이 둥글게 내려앉은 싱크홀이다.